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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찔레꽃이 뭉텅뭉텅 피던 날

부깨 2023. 5. 16. 09:21

 

 

 

그날 밤  / 최수일

 

 

저녁 어스름이 서둘러

마당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시집 안 간 고모가 부리나케 안방으로 달려가고

아래채 툇마루에 쪼그려 앉은 할배는

곰방대로 마루 끝을 탁탁 치며

음 으흠, 연신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삽살개는 안절부절 못하고

마당을 돌며 안방을 힐끔거리고

어느 누구도 나를 아는 체하지 않았다

집안을 떠도는 무슨 슬픔 같은 것에

온몸이 짓눌린 나는

 

엄마를 부를 엄두도 못 내고

안방 앞에 서 있는 기둥을 잡고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뒷산 어디에선가

수만 리 먼 데

월동에서 갓 돌아온 새끼 뻐꾸기가

그날의 마지막 울음을 큭큭 쏟아냈다

 

그러니까 내가 네 살인가 다섯 살이었을 때

은하수가 뒤란 울타리에 오롯이 내려앉기라도 한 듯

하얀 찔레꽃이 뭉텅뭉텅 피던 날

찔레꽃같이 하얀 천에 싸인

내 누이가 할배 팔에 안겨

달빛에 촉촉이 젖고 있는

호미산 어느 산등성이로 떠난 밤이었다

- 힐링문학상 수상작,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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