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닦은 마음은 천 년의 보배다."
❇ 풍경1
소년은 15살이었습니다.
하루는 마을 근처에 있는 절에 놀러 갔습니다.
거기서 동자승을 만났습니다.
동자승은 그에게 명구(名句) 하나를 읊었습니다.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요.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一朝塵) 이다.”
뜻을 풀면 이렇습니다.
사흘 닦은 마음은 천 년의 보배요,
백 년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의 티끌이다.
소년은 상당히 조숙했었나 봅니다.
그는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큰 감동도 받았습니다.
자신이 갈 길이 바로 이 길임을 직감했습니다.
소년은 그 길로 몰래 집을 나와 출가를 했습니다.
15살 소년의 자발적 출가였습니다.
그 소년이 누구냐고요?
불교계에서 강백(講伯)으로 이름이 높은 무비(無比) 스님입니다. 15살 소년은 이제 79살의 노장입니다.
❇ 풍경2
예전에 가톨릭에서 주관한‘죽음 체험 피정’을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줄지어 선 참석자들은 자기 차례가 되자
관 속에 들어가 누웠습니다. 잠시 후 관 뚜껑이 닫혔습니다.
그 속에서 5분가량 있다가 다시 나왔습니다.
그런데 관에서 나온 사람마다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사람들은 묵상을 통해 또 명상을 통해 삶과 죽음을 들여다본다. 삶을 통해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을 통해 삶을 바라본다.
거기서 종종 지혜가 올라온다.>
그걸 쭉 지켜보던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저들은 무엇을 본 것일까, 저들은 왜 눈물을 흘리는 걸까.
저는 취재수첩과 카메라를 잠시 내려놓고 줄을 섰습니다.
제 차례가 왔고,저는 관 속으로 들어가 누웠습니다.
곧이어 관 뚜껑이 닫혔습니다.
관 뚜껑과 관, 그 사이로 실처럼 가느다란 빛이 들어왔습니다.
아주 캄캄한 어둠은 아니었습니다.
잠시 후 관 뚜껑 위로 천이 덮였습니다.
그러자 빛이 하나도 없는 완전한 어둠 속에,
제가 누워 있었습니다.
아, 여기가 무덤이구나. 공간은 철저하게 분리돼 있었습니다.
관 속과 관 바깥은 달라도 아주 달랐습니다.
가장 먼저 딱!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관 바깥세상에 있는 어떠한 것도
이 안으로 가지고 올 수가 없구나.”
관 바깥에는 많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내가 하는 일, 내가 좋아하는 책,
내가 아끼는 이런저런 물건들.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물건도
관 속으로 가지고 들어올 순 없었습니다
“그럼 무엇이 남는 걸까?
관 속에 누워있는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관 속에 누워서 죽음을 묵상하는
'죽음 체험 피정'을 통해 사람들은 삶과 죽음을 다시 돌아봤다. >
이 물음이 저절로 올라왔습니다. 그때 비로소 알겠더군요.
“아! 마음이구나.
죽어서 관 속에 누운 나에게 남는 것은 마음이구나.
이 관 속으로 가지고 들어올 수 있는 건 마음 뿐이구나.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지? 잘 살아야겠네.
마음을 잘 가꾸며 살아야겠네.”
❇ 풍경3
무비 스님의 출가담을 들으며
저는 관 속에 누웠던 ‘죽음 체험 피정’이 떠올랐습니다.
<무비 스님은 슬픔 속에 서 있으면서도
슬픔에 젖지 않는 삶이야말로 가뿐한 삶이라고 했다.>
사흘 닦은 마음이 천 년의 보배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구절에 무척 공감이 갔습니다.
왜냐고요? 죽은 뒤에 내가 가져가는 건
마음뿐이라는 걸 절감했으니까요.
아무리 빛나는 보석도, 아무리 좋은 자동차도,
아무리 좋은 집도 가지고 갈 수가 없더군요.
오직 하나, 나의 마음만 가지고 갈 뿐이었습니다.
❇ 풍경4
무비 스님에게 이런 물음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불교는 마음 닦는 종교다. 깨달음의 종교다.
깨닫기 전과 깨달은 후는 무엇이 달라지나?”
<슬퍼하면서도 슬픔에 젖지 않는 삶,
그건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의 삶과 통한다.>
무비 스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달라지는 건 없다. 그 전 그대로 살 뿐이다.
다만 인간의 삶에서 맛봐야 하는 굉장한 기쁨,
엄청난 절망, 잊지 못할 고통 앞에서는 그 차이가 확 달라진다.”
어떻게 달라지는지, 다시 물었습니다.
“도인일수록 폼 잡지 않는다.
정말 명경지수(明鏡止水ㆍ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의 마음을
가진 도인은 더 인간적이다.
더 슬퍼하고, 더 기뻐한다.
다만 그 슬픔과 기쁨에 젖지 않을 뿐이다.
기뻐하되 기쁨에 물들지 않고, 절망하되 절망에 물들지 않는다.
물론 불의를 보면 분노한다.
그런데 그 분노에 물들지 않는다.
결국 어찌 되겠나.
슬픔과 고통과 절망 속에 있어도 ‘나’가 상하는 일이 없다.”
<무비 스님은 "도인일수록 폼 잡지 않는다.
마음껏 기뻐하고 마음껏 슬퍼한다.
다만 거기에 젖지 않을 뿐이다"라고 했다. >
그런 삶은 어떤 삶일까, 다시 물었습니다.
“가뿐한 삶이 된다. 살기가 아주 수월한 삶이 된다.
삶도 가뿐하고, 죽음까지도 가뿐하게 느껴진다.
생사해탈이 대단한 게 아니다.
그게 바로 생사해탈이다.
삶이 뭔가. 인연 따라 세상에 관광 왔다가
돌아갈 시간이 되면 당연히 돌아가는 거다.”
무비 스님은 자신이 입적할 때 다비식도 않겠다고 했습니다.
괜히 산 사람들 번거롭게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몸은 그동안 입었던 옷이니 그냥 벗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이미 시신 기증 서약까지 해놓았다고 했습니다.
<무비 스님은
"남의 바둑에 훈수를 둘 때 바둑판이 더 잘 보이는 이유가 뭔가.
거기에는 '나'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 풍경5
마지막으로 무비 스님에게
‘가뿐한 삶’ ‘물들지 않는 삶’에 대해 물었습니다.
무비 스님은 바둑에 빗대서 답을 던졌습니다.
“하수들이 바둑을 둘 때 고수의 눈에는 다 보인다.
어디에 두면 죽는지, 어디에 두면 사는지 말이다.
곧 죽을 자리인데도 돌을 놓는 것이 빤히 보인다.
사람들은 자기 바둑을 둘 때는 수를 놓칠 때가 많다.
반면 남의 바둑에 훈수를 둘 때는 수가 잘 보인다.
훈수 둘 때는 2급 이상 바둑 실력이 더 높아진다고 하지 않나.
왜 그렇겠나. 바둑에 ‘나’가 없기 때문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삶에 ‘나’가 없으면 지혜가 생긴다.
그래서 인생에서도 고수가 된다.”
사흘 닦은 마음은 천 년의 보배라고 했습니다.
무비 스님은 그런 마음을 어떤 식으로 닦아야 하는지
중요한 힌트를 주었습니다.
<나의 삶에서 한 발 뚝 떨어져 보는 여유,
거기서 지헤가 나온다고 무비 스님은 강조했다.>
남의 바둑에 훈수 두듯이 한발 뚝 떨어져서
나의 바둑을 바라보는 여유.
거기서 나오는 지혜로 나의 바둑을 풀어가는 삶.
그렇게 한 발짝, 또 한 발짝, 또 한 발짝 가다 보면
우리의 삶도 가뿐해지지 않을까요. 수월해지지 않을까요.
물들지 않는 삶이 되지 않을까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백성호 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