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촉하다 - 이규리
브래지어에서 출발하는 사춘기도 있다.
가족들이 집을 비운 사이,
서랍 속에 접어 둔 언니의 봉긋한 브래지어는
내가 꿈꾼 조숙하고 달콤한 흥분이었다.
겨우 밤톨만한 젖멍울이 생겼을 뿐인
내 가슴을 단숨에 수식했던 브래지어의 황홀을,
밤마다 나는 재촉했다.
내 가슴이 부풀어 저 브래지어의 우듬지에 닿기를,
분홍빛 유두가 살며시 끝을 향해 긴장해 있기를,
그러나 재촉했던 지식,
재촉했던 사랑처럼 내 가슴은 그리 빨리 부풀지 않았고
언니의 에로틱한 브래지어는 겉돌았다.
자라지 않은 가슴과 팽팽하게 솟은 브래지어는 겉돌았다.
자라지 않은 가슴과 팽팽하게 솟은 브래지어 사이의 공간만큼
나는 일찍부터 공허 같은 걸 품고 다닌 게 아닐까.
어디를 휘돌아 나왔는지 언덕과 낭떠러지를 가졌던
내 안의 길에서 밀어 올렸던 꽃대,
재촉했던 꽃은 오다가 자지러져 꽃턱에 걸렸다.
아직도 재촉할 희망이 있는가.
끝없이 채우려 했던 내 안의 곳간들 더욱 비어 있고
이제 우듬지에 닿았던 유두가 조금씩 빈틈을 가지지만
빈틈으로 보이는 안과 밖,
어쩌면 나는 오래 전에 분홍빛 꽃이었는지 모른다.
시집『앤디 워홀의 생각』(세계사, 2004)
<블로그 '시와 음악이 머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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