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 문병란
나는 당신들을
벚꽃을 보듯 볼수는 없다
4월 달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온몸으로 웃는 저 활짝 핀 꽃
그 꽃의 청신한 자태를 보듯 볼 수는 없다.
누군가 말했다, 벚꽃은
순결하고 열정적이고
천하의 봄을 한거번에 물들이고 남는
넉넉하고 융융한 빛깔,
다 드러내고 감춘 것 없는 정직한 꽃
봄 동산 가득 향기로 채우는
가장 아름다운 꽃 중의 꽃 이라고.
그러나 나는 당신들을
벚꽃 피는 봄날
게이샤의 두 빰에 흐르는 홍조,
다소곳한 그 아미
간드러진 사미생의 가락에 따라
높고 낮게 흔들리는 살풋한 그 춤사위
진정, 그 일본의 여인의
아양진 연가를 듣듯 바라볼 순 없다.
벚꽃의 향기 밑에
살모사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고
게이샤의 미소 밑에
피비린 닛본도의 캇날이 숨어 있음을
우리는 똑똑히 보아왔다.
자국내 자국끼리 통하는
일본 국민의 근면과 정직성이
남의 나라 국경을 넘어오면
침략이 되고 전쟁이 됨을
우리는 똑똑히 보아 왔다.
잘도 핀 벚꽃을 보면서도
우리는 피 내음새를 연상해야 하고
아름다운 국화꽃 속에서도
잔혹한 닛본도의 피 냄새를 잊지 않는다.
우리의 남과 북의 기나긴 생이별의
진정, 그대들과 무관하다 생각하느냐
이 땅의 길고 긴 정치의 겨울이
진정, 그대들과 별개의 남의 일이라 생각하느냐.
오늘, 일본은 또 하나의 아시아의 미국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동양의 유태인 새로운 양키라고 보는
우리의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하느냐.
달러를 등에 업은 엔화의 대리 역할
캘리포니아의 사막 무법자의 권총과
에도의 달빛 아래 빛났던 사무라이의 칼날
그 프런티어 정신과 대화혼이 합친
환태평양 시대의 새로운 안보의 고리,
미국의 적자와 일본의 흑자가 만나는 곳에서
한국의 38선은 더욱 멀어가고
미, 소, 일, 중, 새로운 균형 속에
인질로 잡힌 한반도의 분단사
새로운 제국에의 아련한 향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잉태하고 있다.
진정, 당신들이 평화 헌법을 사랑하고
동양의 평화를 원하느냐
북한 동포의 자립 경제의 궁핍이
남한 동포의 저임금과 자유 쟁취의 갈망이
진정, 당신들의 부귀와 무관한 것이냐.
독약에 숨진 민족시인, 복강 감옥의
윤동주의 넋이 역력히 외치고 있는데
도막도막 갈라진 사신, 기미년
유관순 누나의 부릅뜬 눈이 빛나는데
보는대로 죽이리라, 만주 하얼빈 역두의
안중근 의사의 육혈포가 절규하는데
어떻게 쉽사리 잊을 수가 있는가
어제의 역사가 되풀이 되는데
어떻게 속빈 창자 헤헤거리며
새로운 선린의 악수가 가능한가.
오늘도 현해탄은 출렁인다
새로운 제2의 대동아 시대의
태풍주의보 발효 중
어디선가 아직도 총독의 소리는 들려오는데
북한은 고립시켜 목을 조이고
남한은 타락시켜 썩게 하고
돌아와요 부산항에
건망증 왜색 가요를 부르기엔 쑥스럽구나
기생 파티 모셔 놓고
명월관의 추억 가야금에 실으며
그날의 창경원 벚꽃놀이 되풀이는 민망하구나.
현해탄의 파도에 실은 은원의 세월,
관부 연락선의 난간에 기대인 사랑은
오늘도 짝사랑에 새로운 정사를 꿈꾼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
홋가이도와 사할린 냉기어린 탄광,
막장에 묻힌 해골의 외치는 소리
관동군 군화 밑에 짓눌린 정신대,
나이 어린 조선 처녀의 신음 소리가
남양군도 밀림 속에 자지러지고 있다
돌아오지 못하는 땅에 백골로 울고 있다.
오오 일본, 가깝고도 먼 나라여
앙두구육의 경제 대국,
우리들의 피를 딛고 번영하는
20세기의 동양의 아메리카인
또 하나의 양키여.
문병란: 시인. 조선대 국문과교수역임
(1935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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