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조정에서 군사나 병무를 아는 유일한 존재는 유성룡이었다.
유성룡은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장기적으로 전쟁 후유증을 회복하고
침략받지 않는 나라로 재건하기 위해 뭘 해야 하는가 고민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뒤 화기(火器)와 병법(兵法)을 도입하고,
직업 군인제를 창설했으며, 무역이나 통상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하려 애썼다.
왜군 포로를 포섭해 조총 제조법을 익혔고,
명나라에서 신형 대포나 독화살 제조법도
배우려 했으나 잘 가르쳐 주질 않아 애를 먹었다.
징비록은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쓰여졌으나,
이후 이 정신은 계승되지 못했다.
전쟁 당시에는 병사는 고사하고 군량 보급 인력조차 부족하자
"나라가 망하면 노비가 다 무슨 소용이냐"면서
노비들을 면천(免賤)해 동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셌다.
명나라 장수도 "조선에는 노비가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노비 제도 개혁 논의는 눈 녹듯 사라졌다.
강군(强軍) 양성 논의도 흐지부지됐다.
위기가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자 과거의 기억과 개혁 의지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40여년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조선은
한 번 더 외세에 의해 굴욕을 맛봐야 했다.
징비록에 대해 주목한 건 오히려 일본이었다.
17세기 초 부산에는 왜관 외교 사무실이 있었는데 이곳은 일본인이
조선과 교류하고 무역하면서 정탐하는 전진 기지였다.
누군가 왜관 사무실에 국가 기록인 징비록을 넘겼고,
일본은 이를 조선보다 더 열심히 연구했다.
1712년 일본에 갔던 통신사가 오사카 난전에서 징비록이 팔리고 있는 걸
보고 경악했다고 한다.
- 한명기 / 명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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